지난 22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4주간 진행된 제11차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가 합의문 채택에 실패한 채 막을 내렸다. 2015년과 2022년에 이어 세 번째 연속 결렬이다.
1970년 발효된 NPT는 핵무기 보유국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5개국으로 제한하고 나머지 모든 가입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기로 약속한 국제조약이다.
5년마다 열리는 평가회의는 그동안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다음 5년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다. 회원국 만장일치로 최종문서를 채택해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15년째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
회의 의장인 도 흥 비엣 베트남 주유엔 대사는 폐회 선언에서 "최종문서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고만 짧게 말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군비통제협회의 대릴 킴볼 사무국장은 이번 회의가 주요 강대국들의 무능과 무관심, 비타협적 태도로 NPT의 기반이 금이 가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나카미츠 이즈미 유엔 군축고위대표는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핵보유국들이 군축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비보유국들에만 비확산 의무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3회 연속 합의 실패는 국제사회가 뼈저리게 되새겨야 할 교훈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특히 이번 결렬은 이란의 핵개발이 중대한 국제 이슈로 작용하는 현 시점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NPT 평가회의는 무엇이고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번 회의에서 가장 첨예하게 충돌한 조항은 합의문 초안 15항이었다. NPT 6조는 핵보유국이 군축 협상을 성실히 추구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의무는 원칙 선언에 그쳐왔고, 15항은 여기에 구체적인 이행과 투명성 검증 의무를 더하려는 시도였다.
핵보유국이 보유 무기 수, 감축 진척도, 검증 절차를 외부에 공개하게 만들자는 취지다.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5개 핵보유국 모두가 이 조항에 반대했다. 자기 의무를 강화하는 데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비엣 의장은 협상 속도를 높이려고 회의 2주차에 비교적 일찍 초안을 마련했고, 네 차례 수정을 거쳐 폐막일 0시를 넘겨 각국 대표단에 송부했다. 그러나 표결조차 부치지 못했다.
비엣 의장은 어떤 안을 제시해도 특정 국가가 채택을 거부할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며 이미 합의가 부재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표결에 부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란 핵 문제도 평행선이었다. 미국은 이란이 조약상 의무를 경멸하고 있다며 상습적 조약 위반국이라고 비판했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자국 핵시설 공격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맞섰다. 막판 합의문 분량을 줄이는 과정에서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 표명과 한반도 비핵화 관련 문구가 통째로 삭제됐다.
지난 2월 연장 없이 만료된 신전략무기감축조약(뉴스타트)의 후속 협상 개시를 촉구하는 문구도 빠졌다. 뉴스타트는 미국과 러시아 간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핵 군축 협정이었다.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상진 주유엔대표부 차석대사는 북한 문제에 대한 단 한 줄의 메시지조차 담아내지 못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그 메시지에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재확인됐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엣 의장은 NPT의 3대 핵심축인 군축, 비확산, 평화적 이용에 공간을 확보하려고 북한 등 특정 지역 이슈를 과감히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핵 비확산 체제가 가장 시급한 사례조차 다루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는 의미다.
미국의 선택적 핵보유 용인
NPT는 1968년 합의 당시 5개 핵보유국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영원히 비핵 상태에 머물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그렇게 가지 않았다. 미국은 케이스별로 선을 그어줬고 그 선은 일관성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은 NPT에 서명한 적이 없고 핵 보유를 공식 인정한 적도 없다.
1969년 9월 닉슨 대통령과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백악관 단독 회담에서 비밀 합의를 맺었다. 이스라엘이 핵 보유를 공개 선언하거나 핵실험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한 미국은 이스라엘 핵 프로그램을 묵인하고 NPT 가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회담은 보좌진 없이 진행됐고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닉슨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조차 두 사람이 정확히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며칠 뒤에야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키신저는 회담 두 달 전 닉슨에게 보낸 메모에서 이스라엘 핵 프로그램의 국제적 파장은 그것이 공개됐을 때에야 작동하는 것이라며, 보유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비밀로 유지하게 설득하는 것이 차선이라고 적었다. 이 구두 양해는 이후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시니어, 클린턴 대통령이 이스라엘 총리와의 첫 회담 때마다 재확인했다.
1998년 와이리버 정상회담 때는 네타냐후 총리 요청으로 클린턴이 서면 약속서까지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방장관 애슈턴 카터는 2016년 한 회의에서 인도가 책임 있는 핵보유국이라고 공개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런 발언조차 필요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인도는 처음엔 다른 경로였다. 1998년 5월 인도가 24년간의 자체 모라토리엄을 깨고 다섯 차례 핵실험을 강행하자 클린턴은 무기수출통제법 102조에 따라 즉시 경제 군사 제재를 부과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정부를 상대로 한 모든 비인도적 원조를 중단했고 방위 수출과 군사 훈련 프로그램을 막았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 금융기구의 인도 대출에도 반대했다. 1998년 11월 미국은 핵실험에 관여한 인도 기관 208곳을 미국 수출 금지 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백악관은 양국이 비확산 우려에 대응한 긍정적 조치를 취했다며 제재를 완화했다. 의회는 Brownback 수정안으로 대통령에게 제재 면제 권한을 부여했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은 1999년 의회가 부여한 면제 권한을 활용해 1998년 핵실험 관련 제재를 모두 해제했다.
2005년 7월 만모한 싱 인도 총리와 부시 대통령이 발표한 공동성명은 미국-인도 민간핵협정의 시작이었고, 2008년 핵공급국그룹(NSG)이 인도에 특별 면제를 부여하면서 인도는 NPT에 가입하지 않은 채로 국제 민간 핵 거래에 합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1974년과 1998년 핵실험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금수 조치가 사실상 종료된 것이다.
미국이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부상에 대응할 아시아의 균형추가 필요했고 12억 인구를 가진 인도 시장의 전략적 가치가 비확산 원칙보다 무거웠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파키스탄의 케이스
파키스탄은 가장 노골적인 묵인 사례다. 1972년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을 잃은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은 즉시 과학자들을 모아 핵폭탄 제조를 지시했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더욱 가속됐다.
미국 의회는 두 차례의 법을 통해 핵 개발국에 대한 원조 차단 장치를 만들었다. 1976년 통과된 Symington 수정안은 NPT 비가입국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미국 원조를 중단하도록 규정했다.
1985년 Pressler 수정안은 대통령이 매년 파키스탄이 핵폭발 장치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의회에 인증해야 원조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 Symington에 따라 파키스탄 카후타 농축시설 발견 후 실제로 원조를 중단했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파키스탄은 핵심 보급로이자 동맹국이 됐다. 미국은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을 사실상 못 본 척하기 시작했다.
레이건 백악관은 비확산 법의 허점을 이용해 제재를 피해갔다. 1987년 파키스탄 핵 부품 밀반입 사건인 '페르베즈 사건'이 터졌을 때 켄 애덜먼 군축청장은 이런 허점이 계속된다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레이건에게 경고를 보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01년 9월 22일 부시 대통령은 1998년 핵실험 관련 제재와 파키스탄 핵 개발 관련 다른 제재까지 모두 해제했다. 무샤라프 군부 정권의 대테러 협력이 비확산 원칙보다 우선했다는 뜻이다.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이후 북한, 이란, 리비아에 원심분리기 설계와 부품을 판매한 핵 암시장의 핵심 인물로 드러났다. 미국이 1980년대 내내 외면했던 그 핵 개발이 결국 다른 국가들의 핵 확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의지보다 비용 문제였던 북한 핵개발 견제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이 북한 핵을 묵인하기로 결정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막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컸고 그 비용을 감당하느니 위기를 관리하는 쪽을 선택해온 것이 사실이다.
1994년 1차 핵 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을 실제로 검토했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애슈턴 카터 국방부 부차관보(훗날 국방장관)가 주도한 이 계획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 부딪혔다.
미군 시뮬레이션은 개전 시 미군 사상자 5만 2천 명, 한국군 사상자 49만 명, 민간인 사망자 수십만 명을 예상했다. 서울이 북한 장사정포 사거리 안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이 결정적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폭격 직전 협상으로 방향을 튼 배경이다.
군사적으로 막는 것이 가능했더라도 그 대가가 동맹국 한국의 수도 파괴였다는 점에서 미국은 사실상 군사 옵션을 쓸 수 없는 처지였다.
전략적 우선순위도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안보 자원은 발칸반도, 중동, 9·11 이후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빨려 들어갔다. 부시 행정부가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서도 이라크 전쟁을 우선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체니 부통령은 북한 문제는 중국이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고, 이는 6자회담이라는 다자 틀로 책임을 분산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직접 책임을 지고 끝장을 보려는 협상은 한 번도 진행되지 못했다.
중국 변수도 결정적이었다.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경우 발생할 난민 유입, 한국 주도 통일에 따른 미군 주둔지 북상, 동북아 세력 균형 변화를 중국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통과되는 대북 제재는 항상 중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멈췄다. 석유 공급 차단 같은 결정적 카드는 중국이 거부권으로 막았다. 미국이 제재를 강화하려 할 때마다 중국 국경을 통한 밀무역이 그 효과를 상쇄했다.
협상 자체의 설계 결함도 컸다. 1994년 합의된 틀에서 미국이 약속한 경수로 두 기는 원래 2003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의회 반대와 자금 문제로 실제로는 2003년에야 콘크리트가 부어지기 시작했다. 중유 공급도 의회 승인이 매년 지연됐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먼저 동결 약속을 어겼다고 봤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약속한 보상이 7~8년째 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었다. 양측 모두 상대가 먼저 어겼다고 주장할 수 있는 모호한 구조가 협정에 내장돼 있었던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채택한 '전략적 인내' 정책은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으니 시간을 끌면서 제재로 압박한다는 접근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북한은 2009년 2차 핵실험, 2013년 3차, 2016년 1월과 9월에 4·5차,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을 차례로 강행했다.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ICBM급 화성-15형 발사가 모두 이 기간에 이뤄졌다. 인내가 길어질수록 북한의 능력은 커졌고, 협상의 출발선은 매번 뒤로 밀렸다.
트럼프 1기의 2018~2019년 정상회담은 톱다운 방식의 마지막 시도였다. 북한은 민생 관련 제재 5건 해제를 요구했고 미국은 모든 시설의 전면 폐기를 요구했다. 양측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그 이후 실무 협상은 사실상 재개되지 못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미국 내에서도 북한 핵에 대한 정책 기조가 조용히 변했다. 비확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더 이상 현실적 목표가 아니며 군축(arms control), 즉 핵 보유는 인정하되 추가 확산과 사용 위험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주류가 됐다.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NPT
미국 정부가 이를 공식 입장으로 채택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번 NPT 평가회의 합의문 초안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구가 통째로 삭제된 것은 국제사회가 이 변화를 묵시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5개 강대국 핵보유 이후의 모든 핵개발은 나름의 이유, 심지어 각자 다 다른 이유로 방해받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비밀로 부치는 조건으로 묵인됐고, 인도는 중국 견제 카드로서 정상화됐다. 파키스탄은 아프간 전쟁 협력의 대가로 핵을 인정받았다. 북한의 경우는 공격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 더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제 이란은 무력 공습 두 차례를 거쳐 세 번째 공격 카드가 협상장 위에 올라가 있다. 같은 NPT 체제 안에서 이렇게 모두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비핵보유국 입장에서는 결국 미국에 전략적 가치가 있느냐, 미국 동맹이 강하게 보호해주느냐, 또는 얼마나 빨리 핵을 개발하느냐가 핵 보유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비엣 의장이 이번 결렬을 NPT 체제에 대한 재앙과도 같은 일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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