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가 인공지능 학습 과정에서 작가들의 책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집단소송에 휘말렸다. 이번 소송은 인공지능이 어떤 자료를 학습하고 자라왔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이제 실질적인 법적 판단 단계로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제의 발단은 12월 17일 미국 오리건주에 거주하는 비소설 작가 엘리자베스 라이언이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라이언은 어도비가 자사 인공지능 언어모델인 ‘SlimLM’을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저작물을 포함한 다수의 책을 허락 없이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언어모델이란 사람의 문장을 이해하고 요약하거나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만든 인공지능으로 이메일 정리, 문서 요약, 검색 보조 같은 기능에 활용된다. 이런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억 개에서 수천억 개에 이르는 문장을 컴퓨터에 학습시켜야 한다.
어도비는 SlimLM이 ‘SlimPajama-627B’라는 공개 데이터셋으로 사전 학습됐다고 설명해왔다. 데이터셋이란 인공지능에게 공부시키기 위해 모아둔 방대한 양의 텍스트 묶음을 말한다. SlimPajama는 여러 공개 자료를 모은 뒤 중복되는 내용을 제거하고 정리한 데이터라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 데이터의 출처가 완전히 깨끗한지 여부다.
라이언 측은 SlimPajama가 또 다른 데이터셋인 ‘RedPajama’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RedPajama는 다양한 인터넷 문서와 책을 포함한 대규모 텍스트 모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안에는 ‘Books3’라는 책 모음 데이터가 포함돼 있다.
Books3는 약 19만 권에 달하는 책을 모아둔 자료로 그동안 여러 인공지능 기업이 학습용으로 사용해 왔지만 상당수가 저작권 보호 대상이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소송의 핵심은 SlimPajama가 RedPajama를 가공해 만든 파생 데이터이기 때문에 결국 Books3에 포함된 저작권 책들도 함께 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이번 사건에서는 공개 데이터라고 알려진 자료를 사용했더라도 그 데이터가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고 저작권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는지가 쟁점이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 기업이 학습 데이터의 출처를 어디까지 확인해야 책임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 하게 된다.
이 같은 소송은 어도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1~2년 사이 여러 글로벌 기술기업들이 비슷한 이유로 소송을 당해왔다. 애플과 세일즈포스 역시 인공지능 학습에 저작권 자료를 사용했다는 주장으로 법적 분쟁에 휘말린 바 있다.
특히 올해 9월 인공지능 기업 앤트로픽이 작가들과의 소송을 합의로 마무리하며 거액을 지급하기로 한 사례는 업계 전반에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 이후 인공지능 학습 데이터 문제가 기업 가치와 직결된 리스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어도비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인정될 경우 파급력이 커질 수 있다고 본다. 집단소송은 한 명의 원고가 아니라 같은 피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권리자를 대표해 진행되는 소송이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 소송 대상이 수천 명의 작가로 확대될 수 있고 손해배상 규모도 크게 불어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학습에 사용된 데이터나 모델의 사용을 제한해 달라는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인공지능이 무엇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묻는 싸움이다. 앞으로 법원이 데이터 파생 과정에서의 책임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인공지능 기업들이 학습 데이터 관리 기준을 어떻게 바꿀지가 산업 전반의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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