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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필라델피아 사랑, 핵잠수함과 맞바꾼 표

  • 고건 기자
  • 입력 2025.11.05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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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보기: 한국 해군은 왜 핵잠수함을 그토록 원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을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29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에 “한국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훌륭한 조선소에서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예정”이라며 “우리나라의 조선 산업이 곧 다시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 전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approval)’했다고 언급한 데 이어 이 같은 구체적 장소까지 명시한 것이다. 트럼프가 지목한 필라델피아 조선소는 현재 한국 한화그룹 계열사가 운영 중인 미국 내 대표적 조선시설이다.

 

사진1_미국 필리조선소 전경.jpg

 

필리 조선소는?

 

필라델피아 조선소(Philly Shipyard)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델라웨어강변에 위치한 대형 상선 전문 조선소로 한때 미 해군의 핵심 군수기지였던 ‘필라델피아 해군조선소(Philadelphia Naval Shipyard)’ 부지를 민영화해 1997년 새롭게 설립됐다. 

 

현재는 한국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과 한화시스템이 지분 100%를 인수하고 완전히 소유권을 확보하고 있다. 필라델피아 조선소는 군함보다는 상업용 선박 건조에 특화되어 있으며 미국 내에서 ‘조선산업의 마지막 거점’으로 불린다. 

 

미국 해운 보조법(Jones Act)에 따라 미국 선적용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설 중 하나로 지금까지 컨테이너선·석유 운반선·연안 수송선 등 대형 상선을 미국 해운사 매트슨(Matson)과 호라이즌라인(Horizon Lines) 등에 공급해왔다. 

 

최근에는 미 해양청(Maritime Administration)의 지원을 받아 해상풍력 설치선 및 군수지원선(LNG 공급선 등) 건조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전체 부지는 약 58만㎡ 규모로 대형 도크 2기와 조립 공장, 초대형 크레인 등을 갖추고 있다. 

 

다만 핵추진 잠수함과 같은 군사용 원자력 선박을 건조한 경험은 없다. 따라서 트럼프가 언급한 “필리 조선소에서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발언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군용 선박과 상업용 선박의 건조는 아주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하필 왜 필라델피아 조선소(이하 필리 조선소)를 콕 찝어서 말한 것일까. 필라델피아 말고 다른 곳에서 만들면 안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유가 숨겨져 있다.

 

스윙 스테이트, 필라델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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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의외로 대부분의 주들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후보로 누가 나와도 찍어줄 사람이 정해져 있다. 이렇게 확고한 정치 성향을 가진 나머지 주를 제외하고 많은 선거인단을 보유하며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으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는 경합주를 ‘스윙스테이트(Swing State)’라고 한다.

 

미국은 선거인단 수의 총합을 비교하는 선거 제도를 채택했기 때문에 선거인단을 많이 보유한 진영이 유리하다. 약 10여 개의 스윙스테이트들은 하나같이 선거인단도 많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표심이 대선 결과를 사실상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매 선거마다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된다. 

 

펜실베이니아주는 그중에서도 핵심 경합주로 꼽혀왔다. 선거인단 수가 19명에 달해 경합주 중 규모가 크고 인구 구성 역시 도시와 농촌, 백인과 소수인종, 제조업 지역과 첨단산업 지역이 공존해 미국 내 정치적 스펙트럼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주로 평가된다. 

 

주도인 해리스버그보다 훨씬 큰 도시 필라델피아는 이 펜실베이니아 선거 지형의 중심지다. 흑인·라틴계 등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유권자가 집중돼 있으며 투표율이 높을수록 민주당이 승리하고 낮을수록 공화당이 우세해지는 흐름이 반복돼 왔다. 

 

실제로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후보가 펜실베이니아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것도 필라델피아 시내와 교외 지역의 높은 민주당 투표율 덕분이었다. 반면 2016년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이 지역에서 제조업 쇠퇴와 일자리 감소에 대한 불만을 자극하며 ‘러스트벨트(Rust Belt)’ 표심을 얻어내면서 승리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필라델피아에서의 투표 결과에 따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지 여부가 50%는 결정되는 셈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두 정당은 2024년 대선에서도 펜실베이니아를 전략적 요충지로 설정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유세와 광고, 조직 동원전은 다른 주에서보다 훨씬 치열했고 두 후보 모두 선거 막판까지 이 지역을 직접 찾아 지지를 호소했다. 

 

필라델피아의 제조업이 안고 있는 문제


한때 미국 제조업의 심장이었던 필라델피아는 지금 그 명성을 잃은 도시로 불린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 도시는 철강, 조선, 섬유, 기계 등 거의 모든 산업의 공장이 몰려 있던 ‘세계의 작업장(Workshop of the World)’이었다. 

 

미국 동부 철도망의 요지였던 델라웨어강 유역을 따라 항만과 창고, 공장이 촘촘히 들어섰고 숙련된 노동력 덕분에 도시 전체가 거대한 산업 생태계처럼 돌아갔다. 당시 필라델피아 조선소는 미 해군의 전략적 거점이었고 주변에는 철강소와 기계 부품업체가 수백 곳 넘게 자리했다. 

 

그러나 이 찬란한 산업도시는 1950년대 이후 빠르게 무너졌다.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의 발전이었다. 자동화 기계가 등장하면서 같은 생산량을 훨씬 적은 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는 곧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 

 

땅이 더 넓고 인건비가 더 저렴한 남부와 서부 지역으로 공장들이 옮겨가면서 이들 지역이 새로운 제조 중심지로 떠올랐고 필라델피아는 점점 ‘비용이 비싸게 들어가는 도시’가 됐다. 국제 경쟁이 심해지면서 기업들은 해외로도 눈을 돌렸다. 

 

멕시코와 아시아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기업들이 늘어나자 지역 일자리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제조업이 도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시절과 달리 1980년대 들어서는 그 비중이 10% 이하로 떨어졌다. 

 

1990년대에는 필라델피아 해군조선소, 즉 필리 조선소가 공식 폐쇄되며 상징적인 산업 붕괴의 순간을 맞았다. 지금의 필리 조선소는 그 자리에 남은 몇 안 되는 대형 조선시설로 민영화 이후 상업선 중심의 조선소로 재탄생했지만 당시의 활력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필라델피아의 제조업은 확연한 침체 상태에 있다. 제조업 일자리는 줄었고, 남은 기업들도 자동화와 외주화로 고용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 도시 곳곳에는 사용되지 않는 공장 건물과 오염된 산업용 부지가 방치돼 있고 중산층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빈곤율이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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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역 연준(필라델피아 연준) 보고서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제조업 활동지수는 올해 들어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신규 주문과 출하 지표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은 바로 이 제조업에 종사하는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이다. 

 

주로 공장 노동자, 트럭 운전사, 배관공, 용접공 등 블루칼라 계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저학력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과거 미국 제조업 쇠퇴의 직격탄을 맞았던 러스트벨트(Rust Belt) 지역 주민으로, 공장 폐쇄와 일자리 상실의 상징적 피해자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굳이 “핵추진 잠수함을 필리 조선소에서 짓겠다”고 밝힌 것도 바로 이 펜실베이니아 주의 마가 지지층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한국의 군사 프로젝트를 미국 내 조선소에서 수행하게 되면 막대한 방산 일자리가 창출되고 이는 곧 자신의 핵심 지지층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혜택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핵추진 잠수함 건조는 간단한 용접이나 조립 수준의 작업이 아니다. 고숙련 용접공, 배관 기술자, 금속 엔지니어, 품질 관리 전문가 등 수천 명 규모의 기술직 인력이 필요하며 프로젝트 기간도 수년 단위로 이어진다. 

 

이런 일자리는 미국 내 평균 제조업 연봉인 10만 달러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 방산 산업에서 핵잠수함 관련 숙련 기술직의 평균 연봉은 15만 달러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결국 “한국이 절실한 군사 무기를 지렛대로 미국 내 고임금 기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정치적 신호로 해석된다.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조업 기반이 무너진 필라델피아 주민들의 일자리를 다시 가져와서 돌려주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앞으로 가능한 시나리오

 

핵추진 잠수함 건조는 군사적 사안이자 한미 양국의 경제와 정치 전반에 있어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대형 사업이기 때문에 미국 의회와 지역 정치권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매끄럽게 추진되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첫 핵추진 잠수함을 필라델피아에서 건조하자고 공개 언급한 배경에 바로 이러한 정치적 논리와 표 계산이 자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든 군용 선박 인프라가 풍부하고 고숙련 자국 인력이 많은 한국에서 건조해야 이익이다.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까.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지만 한국이 첫 핵추진 잠수함을 필라델피아에서 건조하겠다고 공개 제안해 정치적 선물을 주고 대신 두 번째 핵추진 잠수함부터는 한국에서 건조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동시에 미국의 상선 발주 물량을 필리 조선소에 배정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일감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맞교환하면 지역의 공화당 정치인들이 표와 지역경제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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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미국 조선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높은 인건비와 부족한 인력에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도 필리 조선소의 활용을 수지타산 관점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본격적인 활용이 불가능하다면 미국 정치인들의 치적 쌓기에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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