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열풍이 미국의 에너지 지형을 바꾸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자료를 인용한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올해 미국이 석탄·가스 화력발전소에 쏟아붓는 투자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넘어설 전망이다.
IEA는 올해 미국의 석탄·가스 발전소 투자액을 500억달러로 예상했다. 이는 같은 부문에서 중국이 지출하는 액수보다 30억달러가량 많은 규모다. 미국의 화석연료 발전 투자가 중국을 앞지르는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이다.
투자 급증의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가 있다. 데이터센터는 방대한 연산을 처리하기 위해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최신 AI 데이터센터 한 곳이 쓰는 전력은 1기가와트(GW)에서 수 GW에 이르며 이는 서구권 대도시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과 맞먹는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 아마존, 메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AI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데이터센터 건설에 뛰어들면서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문제는 전력을 공급받는 방식이다. 기존 전력망에 새로 연결하려면 신청 후 오랜 대기 순서를 거쳐야 한다. 이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기업들은 아예 발전소를 직접 지어 자체 전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렇게 전력망을 거치지 않고 시설 바로 옆에서 전기를 만들어 쓰는 방식을 '비하인드 더 미터(behind the meter)'라고 부른다.
IEA는 올해 1분기에만 미국에서 약 20GW 규모의 가스 터빈 주문이 몰렸고 대부분이 이 자체 발전용이라고 분석했다.
주문이 쏟아지면서 가스 터빈 가격도 치솟았다. 리스타드에너지의 전력 분석가 레이드 람다트싱은 가스 터빈 가격이 킬로와트당 800달러 수준에서 2500달러 이상으로 뛰었다고 설명했다. 수요가 제조 능력을 앞지르면서 값이 급등한 것이다.
그는 가스 발전이 풍력·태양광처럼 날씨에 따라 출력이 오르내리는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커지는 상황에서 전력망을 안정시키는 역할도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재생에너지만으로는 바람이 잦아들거나 해가 지면 발전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언제든 일정하게 전기를 뽑아낼 수 있는 화력발전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터빈 제조사들도 밀려드는 주문에 대응하기 벅찬 상황이다. 세계 3대 가스 터빈 제조사 중 하나인 지멘스에너지는 지난 2월 가스 서비스 부문에서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주문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수주 잔량은 터빈 102기에 달했고 이 가운데 40%가 미국, 35%가 유럽에서 나왔다.
또 다른 대형 제조사인 미쓰비시는 생산 능력을 30%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그것으로도 부족해 이미 받은 주문을 소화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고 밝혔다. GE 버노바 역시 180억달러 규모의 수주 잔량을 쌓아둔 상태다.
미국 수요가 워낙 강해 세계 다른 지역은 터빈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 가스 발전소 신규 주문은 130GW로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IEA는 미국이 이 급증의 핵심 요인이라고 봤다. 반면 중국의 석탄·가스 발전 투자는 올해 오히려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내부의 정책 변화와 중동 분쟁에 따른 가스 가격 상승이 겹친 결과다.
화석연료로의 회귀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에너지연구소(Energy Institute)가 발간한 세계 에너지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석탄 소비량은 10% 늘었다.
천연가스 가격이 50%가량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석탄 발전이 경제성을 갖게 된 영향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미국 에너지부는 인디애나주의 노후 석탄 화력발전소에 대해 예정된 폐쇄 시점을 넘겨 계속 가동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AI가 촉발한 전력 수요가 은퇴를 앞둔 석탄 발전소의 수명까지 연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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