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이 인도네시아에서 추진해 온 대형 배터리 통합 프로젝트에서 공식 철수했다. 회사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협의해 이른바 ‘인도네시아 그랜드 패키지(Indonesia Grand Package)’ 투자 계획을 종료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는 니켈 채굴부터 정련, 전구체·양극재 생산, 배터리 셀 제조까지 전 과정을 한 국가 안에서 통합 구축하는 계획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이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니켈을 현지에서 확보하고 가공과 셀 생산까지 묶어 글로벌 공급망을 완성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총 투자 규모는 수십억 달러로 거론돼 왔다.
LG에너지솔루션은 사업성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한 결과 투자 구조를 조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 속도와 배터리 수요 전망, 원자재 가격 변동성, 자본 집약적 투자 부담 등을 고려했다는 입장이다.
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진행 중인 일부 개별 사업은 계속 유지한다면서도 당초 구상했던 전면적 통합 프로젝트는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배터리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해 왔다. 니켈 원광 수출을 제한하고 현지 가공을 유도하는 정책을 통해 배터리와 전기차 생산 기지를 유치해 부가가치를 높이겠다는 목표였다. 그랜드 패키지는 이러한 정책의 대표적 프로젝트로 평가됐다.
시장은 이번 철수를 두고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투자 환경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최근 전기차 판매 증가세가 둔화되고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생산 계획을 조정하면서 배터리 수요 전망도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
니켈 가격 역시 변동성이 커졌다. 원자재 가격 하락은 원가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대규모 채굴·정련 투자에는 수익성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배터리 생산 설비는 초기 투자비가 크고 회수 기간이 길다. 채굴에서 셀 제조까지 통합하는 구조는 공급 안정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지만, 각 단계마다 가격과 정책 리스크를 동시에 떠안는다. 인도네시아는 자원 민족주의 성격의 정책을 강화해 왔고, 외국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환경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생산 거점을 다변화해 왔다. 미국과 유럽에 합작 공장을 세우고 현지 완성차 업체와 협력해 왔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각국의 보조금 정책이 생산 입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번 인도네시아 프로젝트 철수 역시 자본 배분 전략 재조정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배터리 업계 전반의 투자 속도가 조정 국면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몇 년 전까지는 전기차 보급 확대가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공격적 증설이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수요 둔화와 금리 상승으로 투자 부담이 커졌다. 완성차 업체들도 전기차 전환 속도를 재검토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전히 배터리 산업 육성 의지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지에서는 다른 해외 기업과의 협력 가능성도 거론된다. 다만 통합 밸류체인을 한 번에 구축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는 자금과 정책 안정성 측면에서 높은 문턱이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결정은 전기차 배터리 산업에 대한 전망과 별개로 여건이 빠듯해진 기업들이 개별 프로젝트의 수익성과 리스크를 엄격히 따지는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원자재부터 셀 생산까지 묶는 전략은 공급망 안정성이라는 장점을 갖지만 시장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국 기업들의 국외 대형 자원 프로젝트와 배터리 생산 투자에 대한 보수적 접근 방식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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