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집권 노동당 내부의 반란에 직면하며 정치적 생명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주 지방선거 참패 이후 사퇴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핵심 각료가 잇따라 사임하고 잠재 도전자들이 대권 행보를 공식화하면서 파운드화와 영국 국채(길트) 시장도 함께 출렁이고 있다.
위기의 시발점은 지난 7일 치러진 잉글랜드 지방선거다. 영국 극우 성향 정당인 리폼UK는 약 1257석을 확보하며 10개 지방의회를 장악했다. 반면 노동당은 1121석과 28개 의회를 잃었다.
노동당이 2024년 7월 총선에서 14년 만에 보수당을 누르고 172석 차이의 압승으로 집권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일이다.
선거 직후 노동당 의원 약 80여 명은 스타머에게 사퇴하거나 퇴진 시간표를 제시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14일 기준 이 숫자는 97명까지 늘었다. 스타머는 11일 "점진적 변화로는 충분치 않다"며 성장·국방·유럽 관계·에너지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잔류 의지를 밝혔지만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12일에는 가정폭력·아동성착취 대응을 담당해 온 제스 필립스 내무부 정무차관을 포함해 장관급 1명과 차관급 3명이 동시에 사임했다. 필립스는 사퇴 서한에서 "현 지도부 아래서는 국가와 내가 기대하는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결정타는 14일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의 사퇴였다. 노동당 차기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혀온 스트리팅은 사임 서한에서 스타머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각료직을 유지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고 원칙에 어긋난다"고 적었다. 그는 지난주 지방선거에서 약진한 리폼UK를 "노동당의 통합성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다만 즉각적인 당대표 도전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노동당 규정상 현직 대표에게 도전하려면 노동당 의원(현재 403명)의 20%인 81명의 추천이 필요하다. 후임 보건장관에는 제임스 머레이 전 재무부 수석차관이 임명됐다.
같은 날 또 다른 유력 주자인 앤절라 레이너 전 부총리는 영국 국세청(HMRC)의 조사에서 고의적 탈세나 부주의가 없었다는 결론을 받았다.
2025년 9월 호브 지역 80만파운드짜리 주택을 매입하며 인지세를 4만파운드 적게 낸 사실이 드러나 부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8개월 만이다. 레이너는 미납분을 모두 정산했고 벌금은 부과되지 않았다. 노동당 좌파의 지지를 받는 그는 도전 무대 복귀 가능성을 시사했다.
가장 강력한 잠재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앤디 번햄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이다. 노동당 대표가 되려면 하원의원 신분이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그동안 직접 도전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메이커필드 지역구 노동당 의원 조시 사이먼스가 번햄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퇴 의사를 밝혔고, 15일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는 번햄의 후보 선출 절차 참여를 승인했다. 보궐선거 투표일은 6월 18일이 유력하다. 외부 인사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것은 1965년 레이턴 보궐선거 이후 60여 년 만이다.
다만 메이커필드 지역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리폼UK가 50%, 노동당이 23%를 얻은 곳이라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번햄은 잉글랜드 북서부에서 약 24%포인트의 호감도 우위를 보이는 인기 정치인이지만, 그가 의원이 돼 시장직을 내려놓으면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 재선거에 추가로 약 470만파운드의 비용이 발생한다.
정치 불안은 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하고 있다. 파운드화는 15일 달러 대비 0.4% 하락하며 5주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주간 기준 낙폭은 약 2%로 2024년 11월 이후 가장 크다.
영국 대표 주가지수인 FTSE 100은 같은 날 2% 가까이 빠진 1만165에 마감했다. 10년물 길트 금리는 5.1%대까지 올라 2008년 이후 최고치에 근접했고 30년물은 5.76%로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채권 가격과 금리는 반대로 움직인다.
ING는 시장이 노동당의 좌클릭과 재정준칙 완화, 차입 확대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컨설팅사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는 스타머 교체가 10년물 길트 금리를 약 45bp(1bp=0.01%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추산했다.
현재 거론되는 유력 후보 대부분이 스타머·리브스 재무장관이 강조해 온 재정 건전성보다 적극적 재정 지출에 가깝다는 점이 시장의 불안 요인이다.
여기에 지난 2월 말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그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국제 유가가 급등한 점도 영국 경제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영란은행은 올해 2~3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3.5%까지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베팅 시장은 연내 스타머가 교체될 확률을 약 80%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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