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 유가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될 때마다 급격한 변동성을 보였다. 시장에서는 배럴당 100달러 돌파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번에도 중동 전쟁으로 국제 유가가 빠르게 상승하는 가운데 미국 경제에 미칠 충격은 과거보다 훨씬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토르스텐 슬록은 CNBC 인터뷰에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65달러 수준에서 100달러까지 약 35달러 상승하더라도 미국 경제 전체에 미치는 거시경제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점은 분명하지만 미국 경제 전체의 성장 흐름을 크게 흔들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슬록이 제시한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미국의 에너지 생산 구조 변화다. 지난 10여 년 동안 셰일 혁명이라 불리는 수평 시추와 수압 파쇄 기술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 산유국 가운데 하나이며 순수입국에서 순수출국으로 지위가 바뀐 상태다. 과거처럼 해외에서 들여오는 원유 가격 상승이 곧바로 국가 전체의 비용 증가로 이어지기 어렵다.
둘째는 경제 전체의 에너지 사용 효율이 크게 개선됐다는 점이다. 미국 경제는 1970년대 오일쇼크 시기와 비교하면 같은 경제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사용량이 훨씬 줄어들었다.
산업 구조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와 기술 산업 중심으로 이동한 것도 에너지 소비 강도를 낮추는 요인이 됐다.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에너지 소비가 같은 비율로 늘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셋째는 가계 소비 구조 변화다. 미국 가계가 지출하는 전체 소비 가운데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 과거에는 가계 소비의 약 5%가 석유 관련 지출이었지만 최근에는 약 3% 수준으로 낮아졌다. 유가가 상승하더라도 가계 소비 전체를 흔드는 충격은 예전보다 작아진 셈이다.
이러한 구조 변화 덕분에 유가 상승은 미국 경제 전체보다는 특정 계층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슬록은 특히 저소득 가구가 상대적으로 큰 부담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소득이 낮은 가구일수록 예산에서 식료품, 주거비, 연료비 같은 필수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같은 가격 상승이라도 체감 충격이 더 크게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론 유가 상승이 미국 경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에너지 가격은 물류비와 생산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지표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하려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은 통화 정책 환경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슬록 역시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다시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인정했다.
다만 유럽과 비교하면 미국의 상황은 훨씬 유리하다. 유럽은 여전히 상당량의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 무역수지와 물가가 동시에 악화되는 압력을 받는다. 반면 미국은 원유와 천연가스를 동시에 생산하고 수출하는 국가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미국 경제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매우 취약한 구조였다. 산업 전반이 석유 의존도가 높았고 국내 생산 능력도 제한적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셰일 생산 확대와 산업 구조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에너지 가격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 장치가 늘어났다.
결국 유가 상승이 가져올 경제적 영향은 국가 전체의 경기 침체보다는 물가 상승과 소비 계층 간 부담 차이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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