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스타트업 업계에서 매출 부풀리기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핵심은 ARR(연간 반복 매출)이라는 지표다.
ARR은 구독 형태로 매달 들어오는 매출에 12를 곱해 한 해 매출이 어느 정도 될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클라우드·소프트웨어 업계에서 회사 규모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쓰여왔다.
그런데 최근 AI 스타트업들이 이 ARR을 실제 입금된 돈이 아니라 앞으로 받기로 한 돈, 심지어 무료 시범 운영 중인 계약까지 포함해 발표하면서 시장 전체가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논쟁의 도화선을 당긴 것은 지난 4월 17일 캐나다 리걸테크 스타트업 스펠북의 스콧 스티븐슨 최고경영자(CEO)가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그는 "많은 AI 스타트업이 매출 기록을 갈아치우는 이유는 부정직한 지표를 쓰기 때문이며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VC)들이 이를 묵인하고 언론을 호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핵심 수법은 'CARR(계약된 ARR)'을 ARR로 둔갑시키는 방식이다. CARR은 이미 계약은 맺었지만 아직 제품이 도입되지 않아 돈이 들어오지 않은 매출까지 합산한 수치다.
한 VC는 테크크런치에 어떤 스타트업의 경우 CARR이 실제 ARR보다 70% 높았고 그 차액 상당 부분은 결국 회수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고 밝혔다. 스티븐슨 본인도 자신이 확인한 사례 중에는 CARR과 실제 매출의 격차가 3~5배에 달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투자사인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는 2021년 자사 가이드에서 CARR을 ARR에 도입되지 않은 계약 가치를 더하고 예상 해지율과 다운셀(고객이 결제 규모를 줄이는 경우)을 차감해 산출하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보정 없이 계약 총액이 그대로 ARR로 발표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여러 투자자들은 어떤 유명 엔터프라이즈 스타트업이 ARR 1억 달러 돌파를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중 입금된 돈은 일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도입조차 시작되지 않은 계약이었다고 전했다.
한 전직 직원은 자신이 일했던 스타트업이 1년짜리 무상 시범 계약을 ARR에 포함시켰고 이사회에 참여한 대형 VC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문제는 같은 'ARR'이라는 약자를 쓰는 '연환산 런레이트(annualized run-rate)' 매출이다. 특정 한 달, 한 주, 심지어 하루치 매출을 12개월로 환산해 발표하는 방식이다. AI 회사들의 매출 상당 부분이 토큰이나 사용량에 따라 변동하는 구조라 이런 수치는 다음 달이면 달라질 수 있다.
인텔 캐피털은 이를 '실험적 런레이트 매출(ERR)'이라 부르며 신생 AI 회사 매출의 상당수가 단기 실험성 사용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관행에 대해 VC들의 태도는 미묘하다. 스티븐슨은 일부 VC가 자신의 포트폴리오 회사를 '독주하는 승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 부풀린 숫자에 적극 동조한다고 봤다. 미국 리걸테크 클리오의 잭 뉴턴 CEO도 일부 투자자가 외부에서 자신들의 회사가 좋아 보이게 하려고 매출 부풀리기를 묵인한다고 지적했다.
클리오는 지난해 11월 5억 달러 시리즈 G 투자를 유치하며 5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회사다. 한 익명 VC는 모두가 CARR을 ARR로 발표하고 있어 어느 한 곳이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토로했다.
성장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운용자산 400억 달러 규모의 제너럴 카탈리스트 헤만트 타네자 CEO는 지난해 9월 20VC 팟캐스트에서 과거에는 매출이 100만, 300만, 900만 달러로 늘면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제는 100만 달러에서 2000만, 1억 달러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성장 기대가 창업자들에게 숫자 부풀리기 유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셀레스타 캐피털의 마이클 마크스 창립 매니징 파트너는 기업가치가 높아지면서 부풀리기의 유인도 함께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에 4월 27일 세계적인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의 개리 탄 CEO는 '매출에 대해 정직하고 정확하게'라는 가이드를 공개하고 창업자들에게 의향서(LOI), 예약금(bookings), 매출, 반복 매출 등 단계별 지표를 혼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헬로 페이션트의 알렉스 코언 CEO는 업계 내부 사람이라면 일부 스타트업이 창업 몇 년 만에 ARR 1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헤드라인을 보고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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